원나라의 일본 원정(元日戰爭)은 1274년과 1281년의 두 번에 걸쳐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시도한 일본에 대한 군사 침공을 말한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부마국(駙馬國) 충렬왕에게 출정을 강제로 요구하여 만들어진 원정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방어와 도중에 만난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명칭 한국 및 중국의 사료에는 주로 동정(東征) 내지 정동(征東), 정일본(征日本)으로 언급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원나라의 일본원정(日本遠征)', 중국의 사학자들은 원일전쟁(元日战争)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측에서 해당 사건을 가리켜 부르는 원구(元寇)라는 용어는 흔히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이 편찬한 대일본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18세기 長村鑒의 『몽고구기』(蒙古寇紀)、오미야야마 마사히데(小宮山昌秀)의 『원구시말』(元寇始末)、19세기의 大橋訥庵의 『원구기략』(元寇紀略) 등 한국이나 중국의 왜구에서와 같은 「구」(寇)를 사서가 등장해, 해당 사건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갔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대 및 그 시점에서 멀지 않은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 문헌에서는 모코 슈라이(蒙古襲来), 이조쿠 슈라이(異賊襲来), 모코 갓센(蒙古合戦), 이코쿠 갓센(異国合戦) 등으로 표기되어 등장한다. '이조쿠(異賊)'라는 호칭은 일본 이외의 외래로부터 침입해 온 세력을 가리키는데 쓰였는데 『하치만구도훈』(八幡愚童訓) 등 가마쿠라 시대 후기를 전후한 문헌에서는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나 진구 황후(神功皇后)에 의한 삼한정벌(三韓征伐) 전설에 대해서도 이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흉도」(凶徒)라는 호칭도 사용되었다. 또한 1274년의 1차 침공을 분에이 캇센(文永合戦)、1281년의 제2차 침공을 고안 캇센(弘安合戦)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용 제 1차 원정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게 되자 1268년에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통하여 일본에 사절을 보내 통호의 뜻을 전하고 입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조정측에서는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싯켄(執權)이었던 호조 도키무네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몽고의 사절은 그 후에도 사절을 보내 왔으나 막부는 몽고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1] 결국 몽골은 고려로 하여금 원정을 준비하도록 압박했고 1274년(충렬왕 1년)11월 제 1차로 일본을 침략하였다. 막대한 비용이 소비되는 일이었지만 고려로서는 반대할 수 없었다. 원나라의 강압으로 꾸려진 원정군은 원나라의 훈둔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사령관으로 지정되어 9백 척의 함선에 총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출발하여 10월 5일에 쓰시마(對馬), 10월 14일에 이키(壹岐)를 습격하고, 규슈의 하카타항에 도착, 히라도(平戶)·다카시마(鷹島)의 마쓰우라(松浦)의 본거지를 전멸시켰으나 전투 내내 태풍으로 인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고[2], 강남군의 지연 도착으로 군사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긴 연유로 하여 다음날 퇴각하였다. 개국을 목표로 1차 군사적 조치를 통한 압박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제 2차 원정 제 2차 원정은 1281년(충렬왕 7년)에 행해졌다. 고려를 거쳐 가는 동로군(東路軍)은 함선 900, 병원(兵員) 4만, 강동군(江東軍)은 함선 3,500, 병원 10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물론 해상의 기후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동시에 당시 일본의 정권을 쥐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과 일본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던 원의 국내 사정에도 원인이 있었다. 3차 정벌 준비 3차 정벌도 준비 했으나 남송에서 반란이 일어나 도중에 계획이 무산되었다. 결과 고려의 기 고려 두 차례에 걸친 원정에 강제 동원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농민들이 이 새로운 동원으로 입은 참상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목선이나 무기에 동원된 자원도 엄청나서 여몽전쟁에 시달린 고려 백성에게 더욱 큰 부담이 되었으며, 원정 도중 징발된 많은 고려 백성이 원정 도중 만난 태풍으로 인해 사망해서 인적 손실 또한 막대하였다. 무엇보다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하였고, 1356년(공민왕 5) 반원(反元)정책을 추진하면서 폐지하게 될 때까지 고려를 압박하였다. 특히 속관(屬官)으로 존재한 이문소는 고려에 존재했던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했다.[3] 일본의 기 일본 원정군의 공격과 미나모토노 가문 후손 단절로 인해 일본도 민심이 흔들리고 전쟁으로 가마쿠라 막부 정권이 쇠퇴하면서 세력이 분열되어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최초로 받은 외부세력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각주 연민수 1998 23쪽. "1268년에 쿠빌라이는 고려를 통하여 사절을 보내 통호의 뜻을 전하고 입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측에서는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싯켄(執權)이었던 호죠 토키무네(北条時宗)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몽고의 사절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사절을 보내 왔으나 막부는 몽고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쿠빌라이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이승한, 푸른역사, 2009) 정동행중서성 欺賣詐妄偏誕矯誘僞到罔誣蒙調瞞詭變騙譎姦伋張謬誑抵犯迋諼訛謾讒豫謨諠訑訏詫譸拐眩㗄谩䛲侜謶赚诬瞒㓃倰誈骗诧賺诈谲诡騗諕幠誆诳䛫諆譠谖紿绐緿諔忚売㗈誔㪭㦒譧诪懗譤讆憰誷吪蚩𧫠𧨆𧸖𧫩𥊑𧫽𧩄我吾余予身民愚朕魚卬厶俺台儂蒙調瞞詭變騙譎姦伋張謬誑抵犯迋狡童凶黠能猾獪猾狡惡詐黠兇猾衣膚皮膚肤臚胪㱺肌表𤺧𦢚𦠄𤿘腅腠胕心志腹魂胸肺思腸中根寸神性胃腦本肝指膽膺宮緖意志感情臆腑意思㣺襟虛抱衿㲴傷暴殘毒凶費危蓋殃損厄殆克賊割禍忮慘曝虐癒踐疾㺑惎㥍刻残㲅㥇讒獵伤齕𣧝𣳅𢾃仇𢗏𢤵𨆎𤡙盖沴遏毀剝㐫敝𢦏㫧㬥㓙费狡龁枳䄃𣧑威𪗟损曷𨸷蠹擠礙葢䜛挤揍谗㦑㨈憨瘉蠧耗𠐣碍甾疚寇措惨贼旤祸狡猾獪㺒狯䛢姡㛿𤠖𢛛迌狡吏猾智狡情𡠹𧭇𠋬𡜶𤟋欺賣詐妄偏誕矯誘僞到罔誣攫㸕爴攘𤔗㸕爴𤔩攫𣀮𢺖殺死毒斷六殘減劍劉極兵克殊屠煞夷戮留去擊薨戕壓烹剿殛杀刘虔敲奪漁削越割篡簒收劫褫沒攫剝壤神性神悰胷䰟志肠膓肺腸肝腎㥽意向𦛄𦚍𦙞𦚾肚匘肊恖吋懷䐗䘳胆中脑脳幽緒宫䐉绪鑿虚虗褱懐凿怀作心三日不立文字憚恂愰思心想念意案魂觀端憶感情恖臆慮悰襟抱衿忌𠂺𡴓𢙦𠃼𢗁𢍄㣺䰟懷肊䘳観观覌肩胛胉䯋脻肩胛骨𣄤𩨹𣄘𩩦𩩘𩩲𦚑𦚌𡱎腎牡陰莖屌紫芝屪㞗𣬠𡳇𣬶肾龜龜龜寢不安席䘒牛腎不眠徹夜坐藏之馬陰藏陰縮𧗔越宿腎莖狗腎黃狗腎陰縱天宦鹿鞭鹿腎男莖形陰痿三之陰莖癌脧龍頭龜頭膣屄毴寶唐之陰門腟獨見之明聰明叡智唭越視靑盲三之視覺障碍人空銜下門步藏之貞操權見邪視觀監嘗看視覽審閱處八不用菑䃣䃣𤢪䃣靡窛𢵄葘中被倒竊姦盜偸攘偷窃𢿑𥨷徼襒忨媮婾剽盗姧㡪𢅼愉撟挢狡獪猾狡兔三窟㺒狯䛢𤠖𢛛姡㛿𡠹𧭇狡獪猾狡兔三窟㺒狯䛢𤠖𢛛姡㛿𡠹𧭇𠋬𡜶𤟋迌𠬍狡吏猾智狡情狡童萃厧峙𧽖崻濡滯留連僑侨宿眠寢睡伸寐寑寝㝛㝲暝𡨦𡪷𡪢𡫒臥寢伸俯偃懶卧躺𠥸𠑛寑䖙𣱐頫䫍飯食喫哺茹噬啜糊饌湌餐饋喰飵噍飮吸酌酒仰茶喫爵哈歃餐啐嚥飲啜坐居娑㘴㘸𥦊𨆃𠱯𢋇𡊎𥧚𡋲姬躦袴胯跨𦜮𢆋𧿉𦚬褲裤骻趶髋髖臗𣎑股腓股掌會陰乳鏡動脈輸血變譎姦伋張誑抵犯謬迋諼訛讒謾諠訑訏詫譸眩豫謨侜赚瞒骗賺拐紿㗄谩䛲謶诬㓃倰誈诧诈谲诡騗諕幠誆吪蚩诳䛫諆譠谖绐緿諔忚𧫠䄃威损曷𨸷蠹葢挤揍擠憨瘉礙蠧䜛谗㦑㨈𠐣耗碍甾疚寇惨贼祸措戝旤䄀毁践猟菑䃣逢打搥𢈹扑打討攻征叩批毆撻拷搏注扑攵拉朴斫撲攴搭挨杓椓击捶抌棒殴讨搷㩁摐搕搉朾挌扺槀挞挝刜反宇宙體반우주체식인체食人體식육체食肉體마물체魔物體짐승체獸禽畜體부정정사否定情事부정사음부정정교부정섹스부정결혼부정혼인부정통혼플레이아데스4대무법자630128-1067814朴鐘權的大億劫的削的磨的滅的處理的반사회성인격장애否定腐敗부정부패荷蘭네덜란드尼德蘭아틀란티스Atlantis준아틀란티스준성단준성운지구말데크Maldek리라Lyra베가VegaαLyrae안드로메다아플레이아데스莫無可奈當爲我亞流主義我人之常情不同否非否同非同非同否同不非人之常情나𢦠𣍹𢦓𢦖𢦐𠨐𩵋𨈟𦨶𩇶偺喒俺姎𢓲𨖍𢀹𦩎𦩗𠨂身民朕나我吾余予身民愚朕魚卬厶俺台儂自己侬余原始下等未開無智邪慝狡慝狡猾異他惰差別秀殊相象像空敵賊偸意識體我訝娥餓俄啞哦서울特別市龍山區靑坡洞三街서울특별시용산구청파동3가서울特別市龍山區靑坡洞서울특별시용산구청파동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년~1886년)용산공업고등학교(龍山工業高等學校)서울특별시영등포구봉천동62번지12호박종권패악무도 패덕무례 패륜지도에 대한 처리서부정결혼否定結婚부정혼인否定婚姻부정통혼否定通婚to negate; to de부정정교否定情交to negate; to denyfeeling; senti부정사음否定邪婬to negate; to denywrong; evil; d부정정사否定情事to negate; to denycircumstances;物肉畜生食肉畜生人肉畜生食人肉畜生REPTOIDE物肉人肉食肉食人人面畜顔持續的恒久的恒續的永遠的永劫的永續的永久的無始無終的永久破門削磨滅 pneumanotchdegradationdemotionseizureplunderunauthorizedsharing영등급강등영등급강탈영등급무단공유靈等級降等靈等級强奪無斷共有公有食人식인食肉식육人肉인육원본능無限贖罪任意贖罪永久贖罪一時贖罪無斷贖罪淫獄等活地獄黑繩地獄衆合地獄叫喚地獄大叫喚地獄焦熱地獄阿鼻地獄大焦熱地獄八熱八寒地獄無間地獄무지無知미개未開원시原始하등下等야만野蠻무능無能物肉人肉食肉食人人面畜顔생각사고사색thoughtthinking계획ideathinkconsider기억remembrancerememberlookbackonbringcallsbsthtomind마음의지마음mind의향inclination의도intentionthinkofaboutintendplanmeanMaldek플레이아데스성단(Pleiades star cluster)안드로메다자리 대성운(Andromeda大星雲)거문고자리(라틴어: Lyra)Hercules (constellation)용산공업고등학교(龍山工業高等學校)서울특별시영등포구봉천동62번지12호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봉천동 91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봉천동 347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345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738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625-25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612-24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604-13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738-291 낙원그린빌라 201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龍江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용강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大洞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대동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中洞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중동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校洞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교동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曾坪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서울特別市龍山區靑坡洞서울특별시용산구청파동持續的恒久的恒續的永遠的永劫的永續的永久的無始無終的永久破門削磨滅 바그다드 공방전은 1258년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공방전이며, 1258년 1월 29일부터 2월 10일까지 13일간 지속되었다. 일 칸국의 몽골군과 그 동맹군은 당시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이던 바그다드의 포위, 점령, 약탈에 관여하였다. 바그다드의 거주민 대부분은 학살당하였으며, 수십 만 명으로 추정한다. 몽골군은 몽케 칸 카간의 형제인 훌라구 칸의 지휘 하에 있었으며, 몽케 칸은 메소포타미아까지 영토를 늘릴 작정이었지만 아바스 칼리파국을 곧바로 전복시킬 의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훌라구에게 아바스의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그에게 제시한 카간에 대한 복종과 페르시아의 몽골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 형태의 조공을 바치라는 제안을 거부할 시에 바그다드를 공격하라 명령을 내렸었다. 훌라구는 니자리 이스마일리의 페르시아에 있는 요새들에 대한 군사 활동에 착수하여 알라무트를 장악했다. 그 뒤에 그는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몽케가 아바스 측에 제시한 요건들을 알무스타심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아바스 왕조 측이 몽골의 침입에 대비를 못했음에도, 칼리프 측에서는 바그다드가 침략군에 함락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고 항복을 거부하였다. 훌라구는 그 뒤에 바그다드를 포위하여, 12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항복이 일어나고 일주일 동안,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약탈하였고, 수 많은 잔혹한 행위들을 저질렀다. 역사가들은 아바스 왕조의 수 많은 도서관들과 서적들의 파괴 정도에 대해서 추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몽골군은 알무스타심을 처형하였고 도시의 여러 거주민들을 학살하였으며, 이에 따라 엄청난 인구 감소가 벌어졌다. 이 공방전으로 칼리프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신드주까지 자신들의 지배력을 팽창하였고, 또한 다양한 분야의 많은 문화적 성과들이 일어났던 이슬람의 황금기가 종료되었다.[4] 배경 바그다드는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의 후손들이 지배자들로 있는, 세 번째 칼리프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 세기 동안 수도로 있었다. 751년에, 아바스 왕조의 일가가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고 칼리프의 거처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왔다. 바그다드가 번영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인구가 거의 백만 명에 육박했고 60,000명의 병사가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13세기 중엽 쯤에 아바스 왕조의 힘이 쇠퇴하였고 튀르크 및 맘루크의 군벌들이 흔히 칼리프들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5] 바그다드는 여전히 대단한 상징적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부유함과 문화의 도시로서 남아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칼리프들은 동방의 팽창하고 있던 몽골 제국과 관계 발전을 하고 있었다. 1180년부터 1225년까지 재위한 칼리프 안나시르 일디니일라흐는 화레즘의 무함마드 2세가 아바스 왕조를 위협했을 당시 칭기즈 칸과 동맹을 시도했을 것이다.[5] 일부 십자군 포로들이 몽골의 칸에게 조공으로서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다.[6]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 칸은 휘하 장군인 초르마칸에게 바그다드를 공격하라 지시했다고 한다.[7] 1236년, 초르마칸은 아바스의 지배 하에 있던 아르빌로 몽골군 한 개 사단을 이끌고 갔다.[8] 뿐만 아니라 아르빌 및 그 외 지역들에 대한 약탈 행위는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9] 일부 약탈은 바그다드에 이르게 되었다고도 하며,[10] 그렇지만 이 몽골군의 침입은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였고, 아바스 병력이 1238년에[11] 그리고 1245년에 침입을 격퇴시키기도 했다.[12] 이러한 방어 성공에도,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싶어했고 1241년경에 몽골의 칸 궁정에 매년마다 공물을 보내는 행위를 받아들였다.[10] 칼리프가 보내온 사절단은 1246년의 귀위크 칸의 대관식[13] 그리고 1251년의 몽케 칸의 대관식에 참석했었다.[14]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귀위크 칸은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완전하게 몽골의 지배에 굴복하고 직접 카라코룸에 와야한다 주장하였다. 카간들은 칼리프의 제의 거절 및 몽골의 커져가던 세력 확장에 대한 아바스 왕조의 저항에 대해서 바이주 노얀의 탓으로 돌렸다. 훌라구의 군사 활동 계획 1257년, 몽케는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페르시아에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형제인 훌라구에게 일 칸국과 그 병력에 대한 권한과 아바스 칼리파국을 포함한 여러 이슬람 국가들을 복속시키라는 지시를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알무스타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던 몽케는 알무스타심이 훌라구에 직접 항복하고, 페르시아의 이스마일파 국가들에 대한 군사 활동에 훌라구의 병력으로 동원될 군사 파견 형태의 조공을 바치라는 제안들을 거부할 시에만 바그다드를 파괴하라 명령하였다. 침공 준비 과정에서, 훌라구는 대규모 원정 병력을 모집하였는데, 몽골 제국 전역에 있는 징병 연령의 남성 중 10분의 1을 징집하였고, 아마 가장 대규모의 몽골 병력을 한 데 모았으며 한 추정에 따르면 150,000명에 이른다.[15] 이 병력들의 지휘관에는 오이라트족의 통치자 아르군 아카, 바이주, 부카 테무르, 구오 칸, 키트부카 그리고 훌라구의 형제인 수니타이를 비롯해 여러 군주들이 있었다.[16] 몽골군은 또한 아르메니아 왕과 그의 병력들, 안티오키아 공국의 프랑크인 부대,[2] 수십 년 전 호라즘의 샤가 자신들의 수도 티플리스를 약탈한 것에 대해 이슬람교인 아바스에 복수를 하려던 조지아의 병력 등 기독교인들의 병력도 포함하였다.[1] 약 1,000명의 중국인 공성 기술자들이 이 병력에 동행하였고,[17] 동시대 페르시아 출신의 관찰가인 아타 말릭 주베이니에 따르면 페르시아와 튀르크의 보조병들도 함께 했다고 한다. 초기 군사 활동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니자리 전역입니다. 훌라구는 병력들을 먼저 페르시아로 이끌고 가서, 루르인, 부하라, 그리고 화레즘샤 왕조의 잔당들에 대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펼쳤다. 이 지역들을 복속시킨 뒤, 훌라구는 니자리 이스마일파들과 이들의 수장 알라 알딘 무함마드에게 관심을 돌렸으며, 알라 알딘 무함마드는 몽케 그리고 훌라구의 친우이자 부하인 키트부카 등 두 명을 살해 시도를 했었다. 아사신 교단의 이 두 명 암살을 실패했음에도, 훌라구는 아사신의 강력한 요새인 알라무트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함락시켜냈다. 몽골군은 이후에 알라 알딘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1255년부터 1256년까지 짧은 기간 아사신의 수장이었던 루큰 알딘 쿠르샤를 처형하였다. 바그다드 점령 훌라구의 바그다드 진격 아사신들에게 승리를 거둔 뒤, 훌라구는 알무스타심에게 서신을 보내, 몽케가 제시한 조건들을 승낙하라 요구하였다. 알무스타심은 그의 조언자이자 최고 재상인 이븐 알알카미의 영향력으로 인해 거절하였다. 역사가들은 항복에 대한 알알카미의 반대의 여러 동기들을, 불신[18]과 무능 때문이라 생각한다.[19] 그 원인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는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심각성에 대해 칼리프를 잘못 인도하였고 칼리프의 수도가 위험에 빠지면 이슬람 세계가 도우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알무스타심에게 장담한 것으로 보인다.[19] 훌라구가 협상을 중단할 만큼 위협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의 요구에 답했음에도,[20] 알무스타심은 바그다드 so 가용 병력을 보충할 병력을 소집하는 것을 등한시하였다. 또한 그는 성벽을 강화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1월 11일경 몽골군은 도시에 근접하였고,[19] 티그리스강 양쪽 강변에 터를 잡아 도시 주변을 에워쌌다. 알무스타심은 마침내 이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몽골군을 공격하러 기병 2만 명을 보냈다. 아바스의 기병들은 몽골군에 완패하였고, 몽골 측의 공병들은 티그리스강을 따라 형성된 수로에 구멍을 뚫어 아바스 병력 후방의 지반을 범람시켜 이들이 갇히게 하였다.[19] 공방전 바그다드를 포위하는 훌라구 군대에 대한 페르시아 측 묘사 (14세기). 공성 장비를 사용한다는 점을 주목 아바스 칼리파 측은 자신들의 수도 방어를 위해알무스타심 휘하의 기병 20,000명을 포함해 군사 50,000명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병력은 급하게 소집되어, 장비 및 훈련이 부실하였다. 칼리프가 형식 상으로는 그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슬람 제국들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는 했으나, 그는 도외시하거나 그러한 능력이 부족하였다. 그의 조롱당할 만한 저항은 각자 방비를 위해 분주했던 맘루크, 그리고 그가 지원을 해줬던 시리아의 에미르들의 충성심을 상실하게 했다.[21] 1월 29일에, 몽골군은 도시 주변으로 말뚝을 세우고 해자를 세우며 바그다드 포위를 개시하였다. 공성 장비와 투석기를 동원한 몽골군은 도시 성벽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2월 5일 쯤에, 방어 시설의 상당 부분을 점거해냈다. 자신의 병력들이 성벽을 탈환할 기회가 희박해진 것을 깨달은 알무스타심은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하려 했으나, 훌라구는 칼리프의 제안을 퇴짜놓았다. 바그다드의 유력 인사 3,000여 명 역시도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살해당하고 말았다.[22] 5일 뒤인, 2월 10일에 도시는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은 13일까지 도시에 진입하지 않다가 일주일간의 학살과 파괴를 시작하였다. 파괴 보물들 속에서 굶어 죽도록 칼리프 (알무스타심)를 가두는 훌라구 (왼쪽). 15세기의 'Le livre des merveilles'에 묘사된 모습 많은 사료들은 몽골 정복자들의 잔혹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바그다드는 수십 년간 인구가 급감하였고, 황폐화된 도시이었고[23][24] 과거의 영광의 일부를 서서히 회복했을 뿐이었다.[25] 동시대 기록물들은 몽골군 병사들이 약탈을 벌이고, 그 뒤에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 시설들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바그다드의 36개에 달하는 공공 도서관들의 값어치 없던 서적들을 해체되어, 약탈자들은 샌들처럼 자신들의 가죽 덮개로 사용하였다.[26] 수 세대에 걸쳐 일궈진 대규모 건물들은 불에 탔다. 수 없이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들과 의학에서부터 천문학에 이르는 주제들에 대한 서적들을 소장하던 지혜의 집 (바그다드 대도서관)도 파괴되었다. 살해당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피로 붉어진 티그리스강이 흘렀다는 주장들이 있기도 하였다.[27][28] 서적에 대한 폭력성의 모습들은 14세기에 등장하는데, 티그리스강으로 던져진 책들 때문에 티그리스강이 잉크의 검은색으로 바뀌었다는등 서적 파괴에 대한 이야기는 16세기부터 생긴 것으로 보인다.[29][30] Michal Biran은 이 이야기가 몽골의 야만성을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비유일 것이라 주장하였다.[31] 바그다드 거주민들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몽골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대규모로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이는 없었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Martin Sicker는 90,000명에 가까운 이들이 사망했다고 하였다.[32][33] 1262년에 몽골 측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자신들이 바그다드에서 2백만 명을 살해했다고 자랑하였는데, 분명히 과장된 수치일 것이다.[34] 칼리프인 알무스타심은 생포되어 그의 백성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보물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였다. 대부분의 기록들에 따르면, 칼리프는 짓밟혀 죽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양탄자에 싼 다음, 말을 끌고 그 위에 올라가 짓밟히게 하였는데, 몽골인들은 왕족의 피가 땅에 닿을 시에 대지가 분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훌라구는 주둔지를 바그다드 쪽의 맞바람이 치는 것으로 옮겨야만 했는데, 파괴된 도시에서부터 날라오는 부패 악취 때문이었다.[35] 역사가 데이비드 모건은 바그다드 파괴를 묘사하는 데 있어 와사프 (1265년 출생으로, 바그다드 파괴가 일어난 지 7년 후에 태어났다)를 인용하였다: "굶주린 매가 비둘기를 공격하거나, 맹렬한 늑대 무리가 양을 공격하듯이 몽골인들은 말 고삐를 늘어트리고 수치심 없는 얼굴로 도시를 휩쓸었으며, 살인을 벌이고 공포심을 퍼트렸다...황금으로 만들어지고 보석들이 장식된 침구류들은 칼로 조각나 갈기갈기 찢겼다. 거대한 하렘의 장막 뒤로 숨은 이들은 거리와 골목으로 끌어당겨져...하나씩 하나씩, 노리개가 되었다...침입자들의 손에 바그다드인들은 사망하였다."[36]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과한 반몽골적인 중세 사료들에 대해 의심을 표하고 있다.[37] 예시로 George Lane (SOAS)은 몽골인들이 바그다드 대도서관를 파괴했다는 것에 대해 나시르 알딘 투시 같은 몽골 지휘관의 학식있는 인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과 질병이 대규모 사망 원인이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38] 1차 자료들은 투시가 수천 권의 서적들을 지켜내 마라게에 있는 한 건물로 옮겼다고 전한다.[39][40][41] 농업 쇠퇴의 원인 일부 역사가들은 몽골의 침입이 수천 년간메소포타미아를 유지해온 관개 시설의 대부분을 파괴했다고 믿는다. 관개 수로들은 군사적 전략 일환으로 끊겼고 수리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떠나서 관개 시설을 유지할 충분한 인력이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고 고장나거나 토사가 쌓이고 말았다. 이 이론은 2000년 서적 'A History of Inner Asia.'에서 역사가 스바트 소우체크가 제시한 것이다(그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다른 역사가들은 농업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염류집적을 제시한다.[42] 여파 훌라구는 바그다드 재건을 위해 후방에 몽골 병력 3,000명을 남겨두었다. 아타 말릭 주베이니는 이후에 구오 칸이 쿠빌라이의 송나라 정복을 돕기 위해 원나라로 돌오가자 바그다드, 하 메소포타미아, 후제스탄의 총독이 되었다. 훌라구의 정교회 교도 아내인, 도쿠즈 카툰은 바그다드의 기독교도 거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중재를 해냈다.[43]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가톨리코스 마르 마키카에게 왕궁을 수여했고, 그를 위해 성당을 지으라 명령하였다.[44] 초기에, 바그다드 함락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바그다드는 점차 경제 중심지가 되었고 국제 무역, 화폐 주조, 종교 업무가 번성하였다.[45] 몽골의 고위 다루가치가 그 이후에 바그다드에 상주했다.[46]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52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케는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파괴한 것에 분노하였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베르케 칸이 다음의 서신을 몽케 칸에게 보내며, (몽케가 중국에서 사망한 것을 모르고) 바그다드 공격을 항의한 것에 대해 인용하였다: "그 (훌라구)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저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몽골 형제인 훌라구와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음에도,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상황이 일 칸국과 전쟁을 선포하도록 이끌었다. 이 분쟁은 베르케-훌라구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47] 레그니차 전투(폴란드어: Bitwa pod Legnicą, 독일어: Schlacht bei Liegnitz, 영어: Battle of Legnica), 리그니츠 전투 또는 발슈타트 전투(영어: Battle of Wahlstatt)는 1241년 4월 9일 실레지아 공국의 도시 레그니차 인근 레그니키 폴(현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레그니차)에서 일어난, 몽골 제국의 군대와 유럽 지역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경건공 헨리크 2세가 지휘하는 폴란드, 모라비아 군대와 봉건 귀족 및 교황이 파견한 기사수도회의 소수 기사들로 구성된 지원군은 몽골의 유럽 침략을 막아보고자 했다. 이 전투는 몽골군이 좀 더 규모가 컸던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에 승리를 거두기 이틀 전에 벌어졌다. 역사적 논란 많은 과거의 전투가 그렇듯이, 군대 구성, 전략 및 실제 전개 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이 부족하며 때로는 현시대에서도 이러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관점은 폴란드와 마조비아군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대패했다는 점이다. 몽골군은 이 당시에 폴란드 서부 지역 원정에 대한 의도가 없었던 걸로 알려졌는데,[8] 폴란드로 간 몽골군이 헝가리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몽골군 본대를 도우러 갔기 때문이다. 몽골군 지휘관 중 한 명인, 카단은 중세 연대기작가들에게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로 자주 혼동되어서, 카이두가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군을 지휘한 것으로 자주 등장한다.[9] 배경 몽골 제국은 쿠만인들이 자신들의 세력권에 굴복했다고 생각했으나, 쿠만인들은 서쪽으로 달아나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헝가리 왕국의 왕 벨러 4세가 쿠만인들을 내놓으라는 바투 칸의 최후 통첩을 거부하자, 수부타이는 몽골의 유럽 침략을 기획한다. 바투와 수부타이는 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두 개의 군을 지휘했고, 바이다르, 카단, 오르다 칸이 지휘하는 제3 군은 헝가리를 도우러 올지 모르는 북쪽의 유럽 세력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우회 공격으로써 폴란드를 공격했다. 오르다의 군대가 폴란드 북부와 리투아니아 남쪽 국경 사이를 황폐화했다. 바이다르와 카단의 군대는 폴란드 남부를 공격했는데, 처음에는 산도미에시를 약탈하고 그 뒤에 3월 3일에 일어난 투르스코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퇴시키고, 3월 18일에 치미엘니크 전투에서 또다른 폴란드군에 승리를 거둔다. 3월 24일에 이들은 크라쿠프를 점령하여 불태워버리고 며칠 뒤에 실레지아 공국의 수도 브로츠와프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바이다르와 카단이 브로츠와프를 점령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있을 때, 이들은 보헤미아 왕국의 왕 바츨라프 1세가 헨리크의 병력의 두 배[10]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이틀 전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8] 몽골군은 유럽군이 합류하기 전에 헨리크의 병력을 가로막기 위해 브로츠와프에서 고개를 돌렸고, 레그니차 폴 인근 레그니차에서 헨리크의 군대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구성 몽골군 몽골군의 중기병 (13-14세기). 수부타이의 본대에서 파견된, 몽골의 분견대 (최소한 1개에서 2개 정도의 투먼)는 전술적 기동성과 궁기병의 속도에 대한 이점을 나타냈다. 몽골군의 전술은 근본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부대들의 여러 차례의 허위 공격과 후퇴였는데, 이러한 전투 방식은 원거리 공격으로 적들을 지속적이면서 천천히 고갈시키고, 적들의 대형을 흐트러트리며, 적의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다수의 병력을 기습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은 주요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된 몽골군의 표준 전술이었으며, 지속적인 전술 훈련과 깃발 체계를 사용한 전장에서의 우월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이 전략 방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몽골군 지휘관들은 전장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찾고 선점하여 노얀 또는 그 보다 낮은 지휘관들에게 병력의 움직임을 명령하기 위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했다. 몽골군의 전술 체계는 기사들이 보조 병력들과 의사소통 없이 진격하는, 유럽의 전술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수를 파악하기가 난해하다. 몽골군 수에 대한 유럽인들의 기록은 다양한데, 일부는 레그니차에서만 10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수치는 유럽 지역에 있던 몽골군 병력 보다 훨씬 많다는 것과 13세기 서유라시아 지역의 몽골군 병참 지원이 미약했던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극심하게 과장된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몽골군의 병력이 최대 25,000명의 기병으로 추측한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C. de Bridia Monachi가 남긴 Historia Tatarorum에선 몽골군 병력이 1만 명이고, 이전의 전투들에서 병력 손실을 겪은 후에는 8,000명 가량으로 줄었다고 한다. 동시대의 유럽 기록 Ystoria Mongalorum에서 몽골군이 1만 명의 기병으로 폴란드를 침입했다고 하며, 이 병력 수치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2] 폴란드 및 동맹 측 제임스 챔버스에 따르면, 헨리크의 병력은 거의 그럴 일을 없어보이지만, 최대 25,000명으로 잡았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훈련을 받지 않았고 장비도 불충분했으며, 때로는 교역용 도구 이외에 다른 무기조차도 없었다고 한다.[11] 훈련이 낮은 병력에는 비만공 미에슈코 2세 휘하의 오폴레 출신의 병력, 모라비아 변경백 데폴티츠 3세의 아들 볼레슬라프가 지휘하는 모라비아군, 비엘코폴스카에서 온 징집병,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마을 골트베르그(Goldberg)(Złotoryja)에서 자원해서 온 바이에른 출신 광부들이 있었다. 헨리크의 보다 잘 훈련된 병력들은 그의 실레지아 피아스트 공작령들에서 모은 병력들과 용병, 극소수의 프랑스 출신 성전기사단 분견대, 다른 외국인 자원병들이었다.[9] 역사가 Marek Cetwiński는 유럽 동맹군이 2,000명이라고 추측한 반면에, Gerard Labuda는 7,000–8,000명이라고 추측했다. 수가 부정확한 튜턴 기사단 파견대가 동맹군에 가담했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지지만, 최근에 Labuda가 15세기 쓰여진 Annals of Jan Długosz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튜턴 기사단은 연대기작가 Jan Długosz가 연대기를 작성을 마친 이후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튜턴 기사단의 프로이센 관구장 포포 폰 오스테르나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전설은, 그가 아내의 수녀원을 방문하는 동안에 이 전투에서 사망했기에 거짓이다.[12] 구호 기사단 역시도 이 전투에 참여했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도 후대의 기록에서 더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Jan Długosz의 문서나 성전기사단의 단장 Ponce d'Aubon가 프랑스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구호 기사단을 언급하지 않는다.[13] Peter Jackson은 레그니차 전투에 참전한 기사단은 성전기사단뿐이었다고 더욱 강조했다.[14] 성전기사단의 기여는 몹시 적었고, 잘 훈련되고 장비를 잘 갖춘 병력이 대략 68–88명으로 추정된다.[7] 프랑스 왕에게 보낸 문서에서 그들의 형제 기사단원 3명, 사관 2명, 500명의 '사내'를 잃었다고 전하는데, 이들의 용어를 고려할 때 사내는 그들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민으로 보이며, 따라서 연합군의 다른 병력들 보다 장비를 갖추었거나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전투 과정 레그니차 전투에서 전사한 헨리크 2세. 헨리크 2세는 병력을 모라비아의 볼레슬라프가 이끄는 바이에른 광부들, 전사한 크라코프 궁전백의 형제인 Sulisław가 이끄는 일부 크라코비아군과 비엘코폴스카 징집군, 미예스코 휘하의 오폴레군, 헨리크가 직접 통솔하는 실레지아군, 모라비아군, 성전기사단원 등 4부대로 나누었다.[9] 챔버스의 전투 묘사에 의하면, 실레지아의 기병대가 몽골군의 선봉대 (만구다이)와 교전을 하기 시작했다. 실레지아 기병대가 밀려나가자, Sulisław 휘하의 비엘코폴스카 기병대와 오폴레의 기병대가 몽골군을 공격했다. 몽골군 선봉대는 퇴각을 하여, 유럽 연합군 기병대가 자신들을 쫓게 했고, 이에 따라 연합군 기병대를 보병들과 떨어뜨려 놓았다. 만구다이가 퇴각했지만, 몽골군 경기병들이 폴란드군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고, 몽골군의 움직임을 숨기고 폴란드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연막이 사용되었다. 몽골군 경기병들이 폴란드군의 측면에서 공격하고 중기병들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동안에, 몽골의 궁병들이 폴란드군에 화살을 퍼부었다.[9] Erik Hildinger는 볼레슬라프의 징집병들이 실제지아군 대신에 공격을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폴란드 기병대들이 몽골군의 거짓 퇴각을 벌이는 동안 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뒤에, 기수 한 명이 폴란드군 측에 "달려라! 달려!" (폴란드어로)라고 소리치며, 미예스코에게 혼란을 주었고, 미예스코는 자신의 오폴레 병력에게 전장에서 퇴각 명령을 내렸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철수는 헨리크가 자신의 예비 병력과 기병대들을 전투에 투입하게 했다.[8] 몽골군은 거짓 후퇴로 전장에서 많은 성공을 거뒀다. 폴란드 기사들이 달아나는 몽골군을 추적하러 유럽 연합군의 본대에서 떨어지면서, 몽골군은 기사들과 보병대들을 분리시켜낼 수 있었고, 이들을 하나씩 격퇴시켰다. Annals of Jan Długosz가 실제 전투가 벌어진 시기가 아닌, 15세기에 쓰였지만, 이 전투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헨리크 2세의 병력은 거의 전멸당했고 헨리크와 모라비아의 볼레슬라프는 전사했으며, 사망한 숫자는 2,000명에서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40,000명 범위로 추측한다. 성전기사단장 Ponce d'Aubon은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에게 기사단은 레그니차와 그 후에 세 개의 성전기사단 마을 및 "탑"에서 일어난 약탈로 500명을 잃었으며[15] 이들 중에 9명의 성전기사단 형제, 기사 3명, 사관 2명을 잃었다고 보고했다.[9] 여기서 500명의 수치는 마을의 민간인들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7] 몽골군의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의 전형적인 전술을 이용한 완벽한 작전이 피해를 최소화했고 공격해오는 보헤미아군을 돌려보낼 만큼의 충분한 병력을 유지해냈다.[출처 필요] 몽골군은 전사자의 수를 세기 위해 죽은 유럽인의 오른쪽 귀를 잘랐고, 전해진 바에 의하면 9개의 자루에 채워졌다고 하며, 이 기록은 몽골에 대한 다수의 유럽 기록들에서도 보이므로 타당성이 있다.[16] 헨리크는 개인 호위병들 3명과 전장에서 이탈하려다가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잘렸다. 이후 몽골군이 레그니차 마을 앞에서 창에 그의 머리를 올려두고 행진했다. 결과 및 영향 실레지아의 성 헤드비히 교회의 제단 장면 중 한 장면: 몽골군이 방어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긴 창에 헨리크 2세의 머리를 달아 보여주고 있다. 1430년 작. 하루 거리에 있던 바츨라프 1세는 레그니차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나서, 튀링겐과 작센의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되돌아갔다. 그는 크워츠코에서 몽골군 선봉대에게 따라잡히고 말았으나 그의 병력은 레그니차의 병력보다 훨씬 많고 강했기에, 몽골군 선봉대는 보헤미아 기병대에게 밀려났다. 바이다르와 카단의 명령이 분견대로서 활동하는 것이었기에, 이들은 보다 큰 부대였던 보헤미아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걸 피하고, 그동안 부대를 쪼개어 소규모 마을과 도시들을 약탈하며, 보헤미아군을 묶어놓았다. 마침내 몽골군은 보헤미아와 폴란드에서 고개를 돌려,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승리를 거둔 바투와 수부타이가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바투 칸이 몽골에서 돌아온 후, 바투와 그의 친척들간에 사이가 몹시 안 좋아져서 몽케 칸이 카간으로 선출되고 나서야 바투는 다시 유럽이 있는 서방으로 향하는 걸 고려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방 계획을 실현하기 전인 1255년에 그는 사망하고 만다. 바투의 형제 베르케 하에서, 킵차크 칸국은 베르크 칸이 바그다드 전투와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을 살해한 것으로 경멸했던 훌라구 칸이 다스린 일 칸국의 친척들과 분쟁에 휩싸인다. 주로 약탈에 목적을 둔, 폴란드에 대한 대규모 침략이 이후에 시작됐다. 부룬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1259–1260년 폴란드 약탈은 성공을 거둔다. 이들은 루테니아의 봉신들의 병력을 동반한, 툴라부가와 노가이 칸의 지휘하에서 다시 약탈을 강행하여, 1286년에는 성공을, 1287년에는 실패를 거두었다. 1270년대까지 몽골군은 지속적인 중앙 유럽 정복에 대한 열망을 보였지만, 폴란드와 헝가리는 킵차크 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들의 동쪽인 루스인들의 영토는 수세기 간 킵차크 칸국의 통치 하에 남아 있었다. 레그니차 전투는 바르샤바에 있는 무명 용사의 무덤에서 "LEGNICA 9 IV 1241"이라는 비문으로 기려지고 있다. 칼카강 전투(Battle of the Kalka River)는 제베와 수부타이가 군대를 이끄는 몽골 제국과 키예프, 갈리치아-볼히니아를 포함한 여러 러시아 공국, 쾨텐(Köten) 휘하의 쿠만(Cumans) 연합군 사이에 벌어졌다. 이들은 므스티슬라프 볼드와 므스티슬라프 3세의 공동 지휘하에있었다. 이 전투는 1223년 5월 31일 현재의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의 칼카 강 유역에서 벌어졌는데, 몽골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몽골의 중앙아시아 침공과 그에 따른 호라즘 제국의 붕괴 이후, 제베 장군과 수부타이 장군이 지휘하는 몽골군이 이라크 아잠으로 진격했다. 제베는 코카서스를 거쳐 본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몇 년간 정복을 계속해 달라고 몽골 황제 징기스칸에게 허가를 요청했다. 징기스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는 습격에 나섰다. 징기스칸은 두 사람에게 원정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코카서스를 통과한 후 그들은 쿠만인을 물리치기 전에 백인 부족 연합을 격파했다. 쿠만 칸은 그의 사위인 갈리시아의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Mstislav Mstislavich)의 궁정으로 도망쳤고, 그는 몽골과의 싸움을 돕겠다고 확신했다. 므스티슬라프 볼드는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 3세를 포함한 루스 왕자들의 동맹을 형성했다. 러시아의 연합군은 처음에 몽골의 후위대를 격파했다. 루스는 며칠 동안 퇴각하는 척하는 몽골 인을 추격하여 군대를 퍼뜨렸다. 몽골군은 칼카 강 유역에서 멈춰 전투 대형을 취했다. 므스티슬라프 볼드와 그의 쿠만 동맹국은 루스의 나머지 군대를 기다리지 않고 몽골을 공격하여 패배했다. 뒤따른 혼란 속에서 몇몇 다른 루스의 왕자들은 패배했고,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는 요새화된 진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3일 동안 버텼던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한 행동을 약속하는 대가로 항복했다. 그러나 그들이 항복하자 몽골인들은 그들을 학살하고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를 처형했다. 므스티슬라프 볼드는 탈출했고 몽골인들은 아시아로 돌아가 징기스칸과 합류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元日戰爭)은 1274년과 1281년의 두 번에 걸쳐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시도한 일본에 대한 군사 침공을 말한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부마국(駙馬國) 충렬왕에게 출정을 강제로 요구하여 만들어진 원정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방어와 도중에 만난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명칭

한국 및 중국의 사료에는 주로 동정(東征) 내지 정동(征東), 정일본(征日本)으로 언급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원나라의 일본원정(日本遠征)', 중국의 사학자들은 원일전쟁(元日战争)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측에서 해당 사건을 가리켜 부르는 원구(元寇)라는 용어는 흔히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이 편찬한 대일본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18세기 長村鑒의 『몽고구기』(蒙古寇紀)、오미야야마 마사히데(小宮山昌秀)의 『원구시말』(元寇始末)、19세기의 大橋訥庵의 『원구기략』(元寇紀略) 등 한국이나 중국의 왜구에서와 같은 「구」(寇)를 사서가 등장해, 해당 사건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갔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대 및 그 시점에서 멀지 않은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 문헌에서는 모코 슈라이(蒙古襲来), 이조쿠 슈라이(異賊襲来), 모코 갓센(蒙古合戦), 이코쿠 갓센(異国合戦) 등으로 표기되어 등장한다. '이조쿠(異賊)'라는 호칭은 일본 이외의 외래로부터 침입해 온 세력을 가리키는데 쓰였는데 『하치만구도훈』(八幡愚童訓) 등 가마쿠라 시대 후기를 전후한 문헌에서는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나 진구 황후(神功皇后)에 의한 삼한정벌(三韓征伐) 전설에 대해서도 이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흉도」(凶徒)라는 호칭도 사용되었다. 또한 1274년의 1차 침공을 분에이 캇센(文永合戦)、1281년의 제2차 침공을 고안 캇센(弘安合戦)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용

제 1차 원정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게 되자 1268년에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통하여 일본에 사절을 보내 통호의 뜻을 전하고 입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조정측에서는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싯켄(執權)이었던 호조 도키무네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몽고의 사절은 그 후에도 사절을 보내 왔으나 막부는 몽고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1]


결국 몽골은 고려로 하여금 원정을 준비하도록 압박했고 1274년(충렬왕 1년)11월 제 1차로 일본을 침략하였다. 막대한 비용이 소비되는 일이었지만 고려로서는 반대할 수 없었다. 원나라의 강압으로 꾸려진 원정군은 원나라의 훈둔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사령관으로 지정되어 9백 척의 함선에 총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출발하여 10월 5일에 쓰시마(對馬), 10월 14일에 이키(壹岐)를 습격하고, 규슈의 하카타항에 도착, 히라도(平戶)·다카시마(鷹島)의 마쓰우라(松浦)의 본거지를 전멸시켰으나 전투 내내 태풍으로 인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고[2], 강남군의 지연 도착으로 군사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긴 연유로 하여 다음날 퇴각하였다. 개국을 목표로 1차 군사적 조치를 통한 압박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제 2차 원정

제 2차 원정은 1281년(충렬왕 7년)에 행해졌다. 고려를 거쳐 가는 동로군(東路軍)은 함선 900, 병원(兵員) 4만, 강동군(江東軍)은 함선 3,500, 병원 10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물론 해상의 기후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동시에 당시 일본의 정권을 쥐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과 일본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던 원의 국내 사정에도 원인이 있었다.


3차 정벌 준비

3차 정벌도 준비 했으나 남송에서 반란이 일어나 도중에 계획이 무산되었다.


결과

고려의 기 고려

두 차례에 걸친 원정에 강제 동원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농민들이 이 새로운 동원으로 입은 참상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목선이나 무기에 동원된 자원도 엄청나서 여몽전쟁에 시달린 고려 백성에게 더욱 큰 부담이 되었으며, 원정 도중 징발된 많은 고려 백성이 원정 도중 만난 태풍으로 인해 사망해서 인적 손실 또한 막대하였다. 무엇보다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하였고, 1356년(공민왕 5) 반원(反元)정책을 추진하면서 폐지하게 될 때까지 고려를 압박하였다. 특히 속관(屬官)으로 존재한 이문소는 고려에 존재했던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했다.[3]


일본의 기 일본

원정군의 공격과 미나모토노 가문 후손 단절로 인해 일본도 민심이 흔들리고 전쟁으로 가마쿠라 막부 정권이 쇠퇴하면서 세력이 분열되어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최초로 받은 외부세력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각주

 연민수 1998 23쪽. "1268년에 쿠빌라이는 고려를 통하여 사절을 보내 통호의 뜻을 전하고 입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측에서는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싯켄(執權)이었던 호죠 토키무네(北条時宗)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몽고의 사절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사절을 보내 왔으나 막부는 몽고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쿠빌라이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이승한, 푸른역사, 2009)

 정동행중서성

欺賣詐妄偏誕矯誘僞到罔誣蒙調瞞詭變騙譎姦伋張謬誑抵犯迋諼訛謾讒豫謨諠訑訏詫譸拐眩㗄谩䛲侜謶赚诬瞒㓃倰誈骗诧賺诈谲诡騗諕幠誆诳䛫諆譠谖紿绐緿諔忚売㗈誔㪭㦒譧诪懗譤讆憰誷吪蚩𧫠𧨆𧸖𧫩𥊑𧫽𧩄我吾余予身民愚朕魚卬厶俺台儂蒙調瞞詭變騙譎姦伋張謬誑抵犯迋狡童凶黠能猾獪猾狡惡詐黠兇猾衣膚皮膚肤臚胪㱺肌表𤺧𦢚𦠄𤿘腅腠胕心志腹魂胸肺思腸中根寸神性胃腦本肝指膽膺宮緖意志感情臆腑意思㣺襟虛抱衿㲴傷暴殘毒凶費危蓋殃損厄殆克賊割禍忮慘曝虐癒踐疾㺑惎㥍刻残㲅㥇讒獵伤齕𣧝𣳅𢾃仇𢗏𢤵𨆎𤡙盖沴遏毀剝㐫敝𢦏㫧㬥㓙费狡龁枳䄃𣧑威𪗟损曷𨸷蠹擠礙葢䜛挤揍谗㦑㨈憨瘉蠧耗𠐣碍甾疚寇措惨贼旤祸狡猾獪㺒狯䛢姡㛿𤠖𢛛迌狡吏猾智狡情𡠹𧭇𠋬𡜶𤟋欺賣詐妄偏誕矯誘僞到罔誣攫㸕爴攘𤔗㸕爴𤔩攫𣀮𢺖殺死毒斷六殘減劍劉極兵克殊屠煞夷戮留去擊薨戕壓烹剿殛杀刘虔敲奪漁削越割篡簒收劫褫沒攫剝壤神性神悰胷䰟志肠膓肺腸肝腎㥽意向𦛄𦚍𦙞𦚾肚匘肊恖吋懷䐗䘳胆中脑脳幽緒宫䐉绪鑿虚虗褱懐凿怀作心三日不立文字憚恂愰思心想念意案魂觀端憶感情恖臆慮悰襟抱衿忌𠂺𡴓𢙦𠃼𢗁𢍄㣺䰟懷肊䘳観观覌肩胛胉䯋脻肩胛骨𣄤𩨹𣄘𩩦𩩘𩩲𦚑𦚌𡱎腎牡陰莖屌紫芝屪㞗𣬠𡳇𣬶肾龜龜龜寢不安席䘒牛腎不眠徹夜坐藏之馬陰藏陰縮𧗔越宿腎莖狗腎黃狗腎陰縱天宦鹿鞭鹿腎男莖形陰痿三之陰莖癌脧龍頭龜頭膣屄毴寶唐之陰門腟獨見之明聰明叡智唭越視靑盲三之視覺障碍人空銜下門步藏之貞操權見邪視觀監嘗看視覽審閱處八不用菑䃣䃣𤢪䃣靡窛𢵄葘中被倒竊姦盜偸攘偷窃𢿑𥨷徼襒忨媮婾剽盗姧㡪𢅼愉撟挢狡獪猾狡兔三窟㺒狯䛢𤠖𢛛姡㛿𡠹𧭇狡獪猾狡兔三窟㺒狯䛢𤠖𢛛姡㛿𡠹𧭇𠋬𡜶𤟋迌𠬍狡吏猾智狡情狡童萃厧峙𧽖崻濡滯留連僑侨宿眠寢睡伸寐寑寝㝛㝲暝𡨦𡪷𡪢𡫒臥寢伸俯偃懶卧躺𠥸𠑛寑䖙𣱐頫䫍飯食喫哺茹噬啜糊饌湌餐饋喰飵噍飮吸酌酒仰茶喫爵哈歃餐啐嚥飲啜坐居娑㘴㘸𥦊𨆃𠱯𢋇𡊎𥧚𡋲姬躦袴胯跨𦜮𢆋𧿉𦚬褲裤骻趶髋髖臗𣎑股腓股掌會陰乳鏡動脈輸血變譎姦伋張誑抵犯謬迋諼訛讒謾諠訑訏詫譸眩豫謨侜赚瞒骗賺拐紿㗄谩䛲謶诬㓃倰誈诧诈谲诡騗諕幠誆吪蚩诳䛫諆譠谖绐緿諔忚𧫠䄃威损曷𨸷蠹葢挤揍擠憨瘉礙蠧䜛谗㦑㨈𠐣耗碍甾疚寇惨贼祸措戝旤䄀毁践猟菑䃣逢打搥𢈹扑打討攻征叩批毆撻拷搏注扑攵拉朴斫撲攴搭挨杓椓击捶抌棒殴讨搷㩁摐搕搉朾挌扺槀挞挝刜反宇宙體반우주체식인체食人體식육체食肉體마물체魔物體짐승체獸禽畜體부정정사否定情事부정사음부정정교부정섹스부정결혼부정혼인부정통혼플레이아데스4대무법자630128-1067814朴鐘權的大億劫的削的磨的滅的處理的반사회성인격장애否定腐敗부정부패荷蘭네덜란드尼德蘭아틀란티스Atlantis준아틀란티스준성단준성운지구말데크Maldek리라Lyra베가VegaαLyrae안드로메다아플레이아데스莫無可奈當爲我亞流主義我人之常情不同否非否同非同非同否同不非人之常情나𢦠𣍹𢦓𢦖𢦐𠨐𩵋𨈟𦨶𩇶偺喒俺姎𢓲𨖍𢀹𦩎𦩗𠨂身民朕나我吾余予身民愚朕魚卬厶俺台儂自己侬余原始下等未開無智邪慝狡慝狡猾異他惰差別秀殊相象像空敵賊偸意識體我訝娥餓俄啞哦서울特別市龍山區靑坡洞三街서울특별시용산구청파동3가서울特別市龍山區靑坡洞서울특별시용산구청파동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년~1886년)용산공업고등학교(龍山工業高等學校)서울특별시영등포구봉천동62번지12호박종권패악무도 패덕무례 패륜지도에 대한 처리서부정결혼否定結婚부정혼인否定婚姻부정통혼否定通婚to negate; to de부정정교否定情交to negate; to denyfeeling; senti부정사음否定邪婬to negate; to denywrong; evil; d부정정사否定情事to negate; to denycircumstances;物肉畜生食肉畜生人肉畜生食人肉畜生REPTOIDE物肉人肉食肉食人人面畜顔持續的恒久的恒續的永遠的永劫的永續的永久的無始無終的永久破門削磨滅

pneumanotchdegradationdemotionseizureplunderunauthorizedsharing영등급강등영등급강탈영등급무단공유靈等級降等靈等級强奪無斷共有公有食人식인食肉식육人肉인육원본능無限贖罪任意贖罪永久贖罪一時贖罪無斷贖罪淫獄等活地獄黑繩地獄衆合地獄叫喚地獄大叫喚地獄焦熱地獄阿鼻地獄大焦熱地獄八熱八寒地獄無間地獄무지無知미개未開원시原始하등下等야만野蠻무능無能物肉人肉食肉食人人面畜顔생각사고사색thoughtthinking계획ideathinkconsider기억remembrancerememberlookbackonbringcallsbsthtomind마음의지마음mind의향inclination의도intentionthinkofaboutintendplanmeanMaldek플레이아데스성단(Pleiades star cluster)안드로메다자리 대성운(Andromeda大星雲)거문고자리(라틴어: Lyra)Hercules (constellation)용산공업고등학교(龍山工業高等學校)서울특별시영등포구봉천동62번지12호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봉천동 91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봉천동 347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345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738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625-25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612-24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604-13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738-291 낙원그린빌라 201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龍江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용강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大洞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대동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中洞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중동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校洞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교동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曾坪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서울特別市龍山區靑坡洞서울특별시용산구청파동持續的恒久的恒續的永遠的永劫的永續的永久的無始無終的永久破門削磨滅


바그다드 공방전은 1258년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공방전이며, 1258년 1월 29일부터 2월 10일까지 13일간 지속되었다. 일 칸국의 몽골군과 그 동맹군은 당시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이던 바그다드의 포위, 점령, 약탈에 관여하였다. 바그다드의 거주민 대부분은 학살당하였으며, 수십 만 명으로 추정한다. 몽골군은 몽케 칸 카간의 형제인 훌라구 칸의 지휘 하에 있었으며, 몽케 칸은 메소포타미아까지 영토를 늘릴 작정이었지만 아바스 칼리파국을 곧바로 전복시킬 의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훌라구에게 아바스의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그에게 제시한 카간에 대한 복종과 페르시아의 몽골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 형태의 조공을 바치라는 제안을 거부할 시에 바그다드를 공격하라 명령을 내렸었다.


훌라구는 니자리 이스마일리의 페르시아에 있는 요새들에 대한 군사 활동에 착수하여 알라무트를 장악했다. 그 뒤에 그는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몽케가 아바스 측에 제시한 요건들을 알무스타심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아바스 왕조 측이 몽골의 침입에 대비를 못했음에도, 칼리프 측에서는 바그다드가 침략군에 함락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고 항복을 거부하였다. 훌라구는 그 뒤에 바그다드를 포위하여, 12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항복이 일어나고 일주일 동안,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약탈하였고, 수 많은 잔혹한 행위들을 저질렀다. 역사가들은 아바스 왕조의 수 많은 도서관들과 서적들의 파괴 정도에 대해서 추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몽골군은 알무스타심을 처형하였고 도시의 여러 거주민들을 학살하였으며, 이에 따라 엄청난 인구 감소가 벌어졌다. 이 공방전으로 칼리프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신드주까지 자신들의 지배력을 팽창하였고, 또한 다양한 분야의 많은 문화적 성과들이 일어났던 이슬람의 황금기가 종료되었다.[4]


배경

바그다드는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의 후손들이 지배자들로 있는, 세 번째 칼리프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 세기 동안 수도로 있었다. 751년에, 아바스 왕조의 일가가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고 칼리프의 거처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왔다. 바그다드가 번영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인구가 거의 백만 명에 육박했고 60,000명의 병사가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13세기 중엽 쯤에 아바스 왕조의 힘이 쇠퇴하였고 튀르크 및 맘루크의 군벌들이 흔히 칼리프들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5]


바그다드는 여전히 대단한 상징적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부유함과 문화의 도시로서 남아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칼리프들은 동방의 팽창하고 있던 몽골 제국과 관계 발전을 하고 있었다. 1180년부터 1225년까지 재위한 칼리프 안나시르 일디니일라흐는 화레즘의 무함마드 2세가 아바스 왕조를 위협했을 당시 칭기즈 칸과 동맹을 시도했을 것이다.[5] 일부 십자군 포로들이 몽골의 칸에게 조공으로서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다.[6]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 칸은 휘하 장군인 초르마칸에게 바그다드를 공격하라 지시했다고 한다.[7] 1236년, 초르마칸은 아바스의 지배 하에 있던 아르빌로 몽골군 한 개 사단을 이끌고 갔다.[8] 뿐만 아니라 아르빌 및 그 외 지역들에 대한 약탈 행위는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9] 일부 약탈은 바그다드에 이르게 되었다고도 하며,[10] 그렇지만 이 몽골군의 침입은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였고, 아바스 병력이 1238년에[11] 그리고 1245년에 침입을 격퇴시키기도 했다.[12]


이러한 방어 성공에도,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싶어했고 1241년경에 몽골의 칸 궁정에 매년마다 공물을 보내는 행위를 받아들였다.[10] 칼리프가 보내온 사절단은 1246년의 귀위크 칸의 대관식[13] 그리고 1251년의 몽케 칸의 대관식에 참석했었다.[14]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귀위크 칸은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완전하게 몽골의 지배에 굴복하고 직접 카라코룸에 와야한다 주장하였다. 카간들은 칼리프의 제의 거절 및 몽골의 커져가던 세력 확장에 대한 아바스 왕조의 저항에 대해서 바이주 노얀의 탓으로 돌렸다.


훌라구의 군사 활동

계획

1257년, 몽케는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페르시아에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형제인 훌라구에게 일 칸국과 그 병력에 대한 권한과 아바스 칼리파국을 포함한 여러 이슬람 국가들을 복속시키라는 지시를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알무스타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던 몽케는 알무스타심이 훌라구에 직접 항복하고, 페르시아의 이스마일파 국가들에 대한 군사 활동에 훌라구의 병력으로 동원될 군사 파견 형태의 조공을 바치라는 제안들을 거부할 시에만 바그다드를 파괴하라 명령하였다.


침공 준비 과정에서, 훌라구는 대규모 원정 병력을 모집하였는데, 몽골 제국 전역에 있는 징병 연령의 남성 중 10분의 1을 징집하였고, 아마 가장 대규모의 몽골 병력을 한 데 모았으며 한 추정에 따르면 150,000명에 이른다.[15] 이 병력들의 지휘관에는 오이라트족의 통치자 아르군 아카, 바이주, 부카 테무르, 구오 칸, 키트부카 그리고 훌라구의 형제인 수니타이를 비롯해 여러 군주들이 있었다.[16] 몽골군은 또한 아르메니아 왕과 그의 병력들, 안티오키아 공국의 프랑크인 부대,[2] 수십 년 전 호라즘의 샤가 자신들의 수도 티플리스를 약탈한 것에 대해 이슬람교인 아바스에 복수를 하려던 조지아의 병력 등 기독교인들의 병력도 포함하였다.[1] 약 1,000명의 중국인 공성 기술자들이 이 병력에 동행하였고,[17] 동시대 페르시아 출신의 관찰가인 아타 말릭 주베이니에 따르면 페르시아와 튀르크의 보조병들도 함께 했다고 한다.


초기 군사 활동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니자리 전역입니다.

훌라구는 병력들을 먼저 페르시아로 이끌고 가서, 루르인, 부하라, 그리고 화레즘샤 왕조의 잔당들에 대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펼쳤다. 이 지역들을 복속시킨 뒤, 훌라구는 니자리 이스마일파들과 이들의 수장 알라 알딘 무함마드에게 관심을 돌렸으며, 알라 알딘 무함마드는 몽케 그리고 훌라구의 친우이자 부하인 키트부카 등 두 명을 살해 시도를 했었다. 아사신 교단의 이 두 명 암살을 실패했음에도, 훌라구는 아사신의 강력한 요새인 알라무트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함락시켜냈다. 몽골군은 이후에 알라 알딘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1255년부터 1256년까지 짧은 기간 아사신의 수장이었던 루큰 알딘 쿠르샤를 처형하였다.


바그다드 점령

훌라구의 바그다드 진격

아사신들에게 승리를 거둔 뒤, 훌라구는 알무스타심에게 서신을 보내, 몽케가 제시한 조건들을 승낙하라 요구하였다. 알무스타심은 그의 조언자이자 최고 재상인 이븐 알알카미의 영향력으로 인해 거절하였다. 역사가들은 항복에 대한 알알카미의 반대의 여러 동기들을, 불신[18]과 무능 때문이라 생각한다.[19] 그 원인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는 몽골군의 침입이라는 심각성에 대해 칼리프를 잘못 인도하였고 칼리프의 수도가 위험에 빠지면 이슬람 세계가 도우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알무스타심에게 장담한 것으로 보인다.[19]


훌라구가 협상을 중단할 만큼 위협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의 요구에 답했음에도,[20] 알무스타심은 바그다드 so 가용 병력을 보충할 병력을 소집하는 것을 등한시하였다. 또한 그는 성벽을 강화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1월 11일경 몽골군은 도시에 근접하였고,[19] 티그리스강 양쪽 강변에 터를 잡아 도시 주변을 에워쌌다. 알무스타심은 마침내 이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몽골군을 공격하러 기병 2만 명을 보냈다. 아바스의 기병들은 몽골군에 완패하였고, 몽골 측의 공병들은 티그리스강을 따라 형성된 수로에 구멍을 뚫어 아바스 병력 후방의 지반을 범람시켜 이들이 갇히게 하였다.[19]


공방전


바그다드를 포위하는 훌라구 군대에 대한 페르시아 측 묘사 (14세기). 공성 장비를 사용한다는 점을 주목

아바스 칼리파 측은 자신들의 수도 방어를 위해알무스타심 휘하의 기병 20,000명을 포함해 군사 50,000명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병력은 급하게 소집되어, 장비 및 훈련이 부실하였다. 칼리프가 형식 상으로는 그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슬람 제국들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는 했으나, 그는 도외시하거나 그러한 능력이 부족하였다. 그의 조롱당할 만한 저항은 각자 방비를 위해 분주했던 맘루크, 그리고 그가 지원을 해줬던 시리아의 에미르들의 충성심을 상실하게 했다.[21]


1월 29일에, 몽골군은 도시 주변으로 말뚝을 세우고 해자를 세우며 바그다드 포위를 개시하였다. 공성 장비와 투석기를 동원한 몽골군은 도시 성벽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2월 5일 쯤에, 방어 시설의 상당 부분을 점거해냈다. 자신의 병력들이 성벽을 탈환할 기회가 희박해진 것을 깨달은 알무스타심은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하려 했으나, 훌라구는 칼리프의 제안을 퇴짜놓았다. 바그다드의 유력 인사 3,000여 명 역시도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살해당하고 말았다.[22] 5일 뒤인, 2월 10일에 도시는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은 13일까지 도시에 진입하지 않다가 일주일간의 학살과 파괴를 시작하였다.


파괴


보물들 속에서 굶어 죽도록 칼리프 (알무스타심)를 가두는 훌라구 (왼쪽). 15세기의 'Le livre des merveilles'에 묘사된 모습

많은 사료들은 몽골 정복자들의 잔혹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바그다드는 수십 년간 인구가 급감하였고, 황폐화된 도시이었고[23][24] 과거의 영광의 일부를 서서히 회복했을 뿐이었다.[25]


동시대 기록물들은 몽골군 병사들이 약탈을 벌이고, 그 뒤에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 시설들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바그다드의 36개에 달하는 공공 도서관들의 값어치 없던 서적들을 해체되어, 약탈자들은 샌들처럼 자신들의 가죽 덮개로 사용하였다.[26] 수 세대에 걸쳐 일궈진 대규모 건물들은 불에 탔다. 수 없이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들과 의학에서부터 천문학에 이르는 주제들에 대한 서적들을 소장하던 지혜의 집 (바그다드 대도서관)도 파괴되었다. 살해당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피로 붉어진 티그리스강이 흘렀다는 주장들이 있기도 하였다.[27][28] 서적에 대한 폭력성의 모습들은 14세기에 등장하는데, 티그리스강으로 던져진 책들 때문에 티그리스강이 잉크의 검은색으로 바뀌었다는등 서적 파괴에 대한 이야기는 16세기부터 생긴 것으로 보인다.[29][30] Michal Biran은 이 이야기가 몽골의 야만성을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비유일 것이라 주장하였다.[31]


바그다드 거주민들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몽골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대규모로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이는 없었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Martin Sicker는 90,000명에 가까운 이들이 사망했다고 하였다.[32][33] 1262년에 몽골 측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자신들이 바그다드에서 2백만 명을 살해했다고 자랑하였는데, 분명히 과장된 수치일 것이다.[34]


칼리프인 알무스타심은 생포되어 그의 백성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보물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였다. 대부분의 기록들에 따르면, 칼리프는 짓밟혀 죽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양탄자에 싼 다음, 말을 끌고 그 위에 올라가 짓밟히게 하였는데, 몽골인들은 왕족의 피가 땅에 닿을 시에 대지가 분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훌라구는 주둔지를 바그다드 쪽의 맞바람이 치는 것으로 옮겨야만 했는데, 파괴된 도시에서부터 날라오는 부패 악취 때문이었다.[35]


역사가 데이비드 모건은 바그다드 파괴를 묘사하는 데 있어 와사프 (1265년 출생으로, 바그다드 파괴가 일어난 지 7년 후에 태어났다)를 인용하였다: "굶주린 매가 비둘기를 공격하거나, 맹렬한 늑대 무리가 양을 공격하듯이 몽골인들은 말 고삐를 늘어트리고 수치심 없는 얼굴로 도시를 휩쓸었으며, 살인을 벌이고 공포심을 퍼트렸다...황금으로 만들어지고 보석들이 장식된 침구류들은 칼로 조각나 갈기갈기 찢겼다. 거대한 하렘의 장막 뒤로 숨은 이들은 거리와 골목으로 끌어당겨져...하나씩 하나씩, 노리개가 되었다...침입자들의 손에 바그다드인들은 사망하였다."[36]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과한 반몽골적인 중세 사료들에 대해 의심을 표하고 있다.[37] 예시로 George Lane (SOAS)은 몽골인들이 바그다드 대도서관를 파괴했다는 것에 대해 나시르 알딘 투시 같은 몽골 지휘관의 학식있는 인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과 질병이 대규모 사망 원인이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38] 1차 자료들은 투시가 수천 권의 서적들을 지켜내 마라게에 있는 한 건물로 옮겼다고 전한다.[39][40][41]


농업 쇠퇴의 원인

일부 역사가들은 몽골의 침입이 수천 년간메소포타미아를 유지해온 관개 시설의 대부분을 파괴했다고 믿는다. 관개 수로들은 군사적 전략 일환으로 끊겼고 수리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떠나서 관개 시설을 유지할 충분한 인력이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고 고장나거나 토사가 쌓이고 말았다. 이 이론은 2000년 서적 'A History of Inner Asia.'에서 역사가 스바트 소우체크가 제시한 것이다(그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다른 역사가들은 농업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염류집적을 제시한다.[42]


여파

훌라구는 바그다드 재건을 위해 후방에 몽골 병력 3,000명을 남겨두었다. 아타 말릭 주베이니는 이후에 구오 칸이 쿠빌라이의 송나라 정복을 돕기 위해 원나라로 돌오가자 바그다드, 하 메소포타미아, 후제스탄의 총독이 되었다. 훌라구의 정교회 교도 아내인, 도쿠즈 카툰은 바그다드의 기독교도 거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중재를 해냈다.[43]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가톨리코스 마르 마키카에게 왕궁을 수여했고, 그를 위해 성당을 지으라 명령하였다.[44]


초기에, 바그다드 함락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바그다드는 점차 경제 중심지가 되었고 국제 무역, 화폐 주조, 종교 업무가 번성하였다.[45] 몽골의 고위 다루가치가 그 이후에 바그다드에 상주했다.[46]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52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케는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파괴한 것에 분노하였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베르케 칸이 다음의 서신을 몽케 칸에게 보내며, (몽케가 중국에서 사망한 것을 모르고) 바그다드 공격을 항의한 것에 대해 인용하였다: "그 (훌라구)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저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몽골 형제인 훌라구와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음에도,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상황이 일 칸국과 전쟁을 선포하도록 이끌었다. 이 분쟁은 베르케-훌라구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47]


레그니차 전투(폴란드어: Bitwa pod Legnicą, 독일어: Schlacht bei Liegnitz, 영어: Battle of Legnica), 리그니츠 전투 또는 발슈타트 전투(영어: Battle of Wahlstatt)는 1241년 4월 9일 실레지아 공국의 도시 레그니차 인근 레그니키 폴(현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레그니차)에서 일어난, 몽골 제국의 군대와 유럽 지역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경건공 헨리크 2세가 지휘하는 폴란드, 모라비아 군대와 봉건 귀족 및 교황이 파견한 기사수도회의 소수 기사들로 구성된 지원군은 몽골의 유럽 침략을 막아보고자 했다. 이 전투는 몽골군이 좀 더 규모가 컸던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에 승리를 거두기 이틀 전에 벌어졌다.


역사적 논란

많은 과거의 전투가 그렇듯이, 군대 구성, 전략 및 실제 전개 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이 부족하며 때로는 현시대에서도 이러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관점은 폴란드와 마조비아군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대패했다는 점이다. 몽골군은 이 당시에 폴란드 서부 지역 원정에 대한 의도가 없었던 걸로 알려졌는데,[8] 폴란드로 간 몽골군이 헝가리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몽골군 본대를 도우러 갔기 때문이다.


몽골군 지휘관 중 한 명인, 카단은 중세 연대기작가들에게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로 자주 혼동되어서, 카이두가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군을 지휘한 것으로 자주 등장한다.[9]


배경

몽골 제국은 쿠만인들이 자신들의 세력권에 굴복했다고 생각했으나, 쿠만인들은 서쪽으로 달아나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헝가리 왕국의 왕 벨러 4세가 쿠만인들을 내놓으라는 바투 칸의 최후 통첩을 거부하자, 수부타이는 몽골의 유럽 침략을 기획한다. 바투와 수부타이는 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두 개의 군을 지휘했고, 바이다르, 카단, 오르다 칸이 지휘하는 제3 군은 헝가리를 도우러 올지 모르는 북쪽의 유럽 세력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우회 공격으로써 폴란드를 공격했다.


오르다의 군대가 폴란드 북부와 리투아니아 남쪽 국경 사이를 황폐화했다. 바이다르와 카단의 군대는 폴란드 남부를 공격했는데, 처음에는 산도미에시를 약탈하고 그 뒤에 3월 3일에 일어난 투르스코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퇴시키고, 3월 18일에 치미엘니크 전투에서 또다른 폴란드군에 승리를 거둔다. 3월 24일에 이들은 크라쿠프를 점령하여 불태워버리고 며칠 뒤에 실레지아 공국의 수도 브로츠와프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바이다르와 카단이 브로츠와프를 점령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있을 때, 이들은 보헤미아 왕국의 왕 바츨라프 1세가 헨리크의 병력의 두 배[10]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이틀 전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8] 몽골군은 유럽군이 합류하기 전에 헨리크의 병력을 가로막기 위해 브로츠와프에서 고개를 돌렸고, 레그니차 폴 인근 레그니차에서 헨리크의 군대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구성

몽골군


몽골군의 중기병 (13-14세기).

수부타이의 본대에서 파견된, 몽골의 분견대 (최소한 1개에서 2개 정도의 투먼)는 전술적 기동성과 궁기병의 속도에 대한 이점을 나타냈다. 몽골군의 전술은 근본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부대들의 여러 차례의 허위 공격과 후퇴였는데, 이러한 전투 방식은 원거리 공격으로 적들을 지속적이면서 천천히 고갈시키고, 적들의 대형을 흐트러트리며, 적의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다수의 병력을 기습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은 주요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된 몽골군의 표준 전술이었으며, 지속적인 전술 훈련과 깃발 체계를 사용한 전장에서의 우월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이 전략 방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몽골군 지휘관들은 전장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찾고 선점하여 노얀 또는 그 보다 낮은 지휘관들에게 병력의 움직임을 명령하기 위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했다. 몽골군의 전술 체계는 기사들이 보조 병력들과 의사소통 없이 진격하는, 유럽의 전술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수를 파악하기가 난해하다. 몽골군 수에 대한 유럽인들의 기록은 다양한데, 일부는 레그니차에서만 10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수치는 유럽 지역에 있던 몽골군 병력 보다 훨씬 많다는 것과 13세기 서유라시아 지역의 몽골군 병참 지원이 미약했던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극심하게 과장된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몽골군의 병력이 최대 25,000명의 기병으로 추측한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C. de Bridia Monachi가 남긴 Historia Tatarorum에선 몽골군 병력이 1만 명이고, 이전의 전투들에서 병력 손실을 겪은 후에는 8,000명 가량으로 줄었다고 한다. 동시대의 유럽 기록 Ystoria Mongalorum에서 몽골군이 1만 명의 기병으로 폴란드를 침입했다고 하며, 이 병력 수치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2]


폴란드 및 동맹 측

제임스 챔버스에 따르면, 헨리크의 병력은 거의 그럴 일을 없어보이지만, 최대 25,000명으로 잡았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훈련을 받지 않았고 장비도 불충분했으며, 때로는 교역용 도구 이외에 다른 무기조차도 없었다고 한다.[11] 훈련이 낮은 병력에는 비만공 미에슈코 2세 휘하의 오폴레 출신의 병력, 모라비아 변경백 데폴티츠 3세의 아들 볼레슬라프가 지휘하는 모라비아군, 비엘코폴스카에서 온 징집병,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마을 골트베르그(Goldberg)(Złotoryja)에서 자원해서 온 바이에른 출신 광부들이 있었다. 헨리크의 보다 잘 훈련된 병력들은 그의 실레지아 피아스트 공작령들에서 모은 병력들과 용병, 극소수의 프랑스 출신 성전기사단 분견대, 다른 외국인 자원병들이었다.[9]


역사가 Marek Cetwiński는 유럽 동맹군이 2,000명이라고 추측한 반면에, Gerard Labuda는 7,000–8,000명이라고 추측했다.


수가 부정확한 튜턴 기사단 파견대가 동맹군에 가담했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지지만, 최근에 Labuda가 15세기 쓰여진 Annals of Jan Długosz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튜턴 기사단은 연대기작가 Jan Długosz가 연대기를 작성을 마친 이후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튜턴 기사단의 프로이센 관구장 포포 폰 오스테르나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전설은, 그가 아내의 수녀원을 방문하는 동안에 이 전투에서 사망했기에 거짓이다.[12] 구호 기사단 역시도 이 전투에 참여했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도 후대의 기록에서 더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Jan Długosz의 문서나 성전기사단의 단장 Ponce d'Aubon가 프랑스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구호 기사단을 언급하지 않는다.[13] Peter Jackson은 레그니차 전투에 참전한 기사단은 성전기사단뿐이었다고 더욱 강조했다.[14] 성전기사단의 기여는 몹시 적었고, 잘 훈련되고 장비를 잘 갖춘 병력이 대략 68–88명으로 추정된다.[7] 프랑스 왕에게 보낸 문서에서 그들의 형제 기사단원 3명, 사관 2명, 500명의 '사내'를 잃었다고 전하는데, 이들의 용어를 고려할 때 사내는 그들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민으로 보이며, 따라서 연합군의 다른 병력들 보다 장비를 갖추었거나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전투 과정


레그니차 전투에서 전사한 헨리크 2세.

헨리크 2세는 병력을 모라비아의 볼레슬라프가 이끄는 바이에른 광부들, 전사한 크라코프 궁전백의 형제인 Sulisław가 이끄는 일부 크라코비아군과 비엘코폴스카 징집군, 미예스코 휘하의 오폴레군, 헨리크가 직접 통솔하는 실레지아군, 모라비아군, 성전기사단원 등 4부대로 나누었다.[9]


챔버스의 전투 묘사에 의하면, 실레지아의 기병대가 몽골군의 선봉대 (만구다이)와 교전을 하기 시작했다. 실레지아 기병대가 밀려나가자, Sulisław 휘하의 비엘코폴스카 기병대와 오폴레의 기병대가 몽골군을 공격했다. 몽골군 선봉대는 퇴각을 하여, 유럽 연합군 기병대가 자신들을 쫓게 했고, 이에 따라 연합군 기병대를 보병들과 떨어뜨려 놓았다. 만구다이가 퇴각했지만, 몽골군 경기병들이 폴란드군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고, 몽골군의 움직임을 숨기고 폴란드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연막이 사용되었다. 몽골군 경기병들이 폴란드군의 측면에서 공격하고 중기병들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동안에, 몽골의 궁병들이 폴란드군에 화살을 퍼부었다.[9]


Erik Hildinger는 볼레슬라프의 징집병들이 실제지아군 대신에 공격을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폴란드 기병대들이 몽골군의 거짓 퇴각을 벌이는 동안 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뒤에, 기수 한 명이 폴란드군 측에 "달려라! 달려!" (폴란드어로)라고 소리치며, 미예스코에게 혼란을 주었고, 미예스코는 자신의 오폴레 병력에게 전장에서 퇴각 명령을 내렸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철수는 헨리크가 자신의 예비 병력과 기병대들을 전투에 투입하게 했다.[8]


몽골군은 거짓 후퇴로 전장에서 많은 성공을 거뒀다. 폴란드 기사들이 달아나는 몽골군을 추적하러 유럽 연합군의 본대에서 떨어지면서, 몽골군은 기사들과 보병대들을 분리시켜낼 수 있었고, 이들을 하나씩 격퇴시켰다.


Annals of Jan Długosz가 실제 전투가 벌어진 시기가 아닌, 15세기에 쓰였지만, 이 전투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헨리크 2세의 병력은 거의 전멸당했고 헨리크와 모라비아의 볼레슬라프는 전사했으며, 사망한 숫자는 2,000명에서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40,000명 범위로 추측한다. 성전기사단장 Ponce d'Aubon은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에게 기사단은 레그니차와 그 후에 세 개의 성전기사단 마을 및 "탑"에서 일어난 약탈로 500명을 잃었으며[15] 이들 중에 9명의 성전기사단 형제, 기사 3명, 사관 2명을 잃었다고 보고했다.[9] 여기서 500명의 수치는 마을의 민간인들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7] 몽골군의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의 전형적인 전술을 이용한 완벽한 작전이 피해를 최소화했고 공격해오는 보헤미아군을 돌려보낼 만큼의 충분한 병력을 유지해냈다.[출처 필요]


몽골군은 전사자의 수를 세기 위해 죽은 유럽인의 오른쪽 귀를 잘랐고, 전해진 바에 의하면 9개의 자루에 채워졌다고 하며, 이 기록은 몽골에 대한 다수의 유럽 기록들에서도 보이므로 타당성이 있다.[16] 헨리크는 개인 호위병들 3명과 전장에서 이탈하려다가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잘렸다. 이후 몽골군이 레그니차 마을 앞에서 창에 그의 머리를 올려두고 행진했다.


결과 및 영향


실레지아의 성 헤드비히 교회의 제단 장면 중 한 장면: 몽골군이 방어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긴 창에 헨리크 2세의 머리를 달아 보여주고 있다. 1430년 작.

하루 거리에 있던 바츨라프 1세는 레그니차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나서, 튀링겐과 작센의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되돌아갔다. 그는 크워츠코에서 몽골군 선봉대에게 따라잡히고 말았으나 그의 병력은 레그니차의 병력보다 훨씬 많고 강했기에, 몽골군 선봉대는 보헤미아 기병대에게 밀려났다. 바이다르와 카단의 명령이 분견대로서 활동하는 것이었기에, 이들은 보다 큰 부대였던 보헤미아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걸 피하고, 그동안 부대를 쪼개어 소규모 마을과 도시들을 약탈하며, 보헤미아군을 묶어놓았다. 마침내 몽골군은 보헤미아와 폴란드에서 고개를 돌려,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승리를 거둔 바투와 수부타이가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바투 칸이 몽골에서 돌아온 후, 바투와 그의 친척들간에 사이가 몹시 안 좋아져서 몽케 칸이 카간으로 선출되고 나서야 바투는 다시 유럽이 있는 서방으로 향하는 걸 고려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방 계획을 실현하기 전인 1255년에 그는 사망하고 만다. 바투의 형제 베르케 하에서, 킵차크 칸국은 베르크 칸이 바그다드 전투와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을 살해한 것으로 경멸했던 훌라구 칸이 다스린 일 칸국의 친척들과 분쟁에 휩싸인다.


주로 약탈에 목적을 둔, 폴란드에 대한 대규모 침략이 이후에 시작됐다. 부룬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1259–1260년 폴란드 약탈은 성공을 거둔다. 이들은 루테니아의 봉신들의 병력을 동반한, 툴라부가와 노가이 칸의 지휘하에서 다시 약탈을 강행하여, 1286년에는 성공을, 1287년에는 실패를 거두었다. 1270년대까지 몽골군은 지속적인 중앙 유럽 정복에 대한 열망을 보였지만, 폴란드와 헝가리는 킵차크 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들의 동쪽인 루스인들의 영토는 수세기 간 킵차크 칸국의 통치 하에 남아 있었다. 레그니차 전투는 바르샤바에 있는 무명 용사의 무덤에서 "LEGNICA 9 IV 1241"이라는 비문으로 기려지고 있다.


칼카강 전투(Battle of the Kalka River)는 제베와 수부타이가 군대를 이끄는 몽골 제국과 키예프, 갈리치아-볼히니아를 포함한 여러 러시아 공국, 쾨텐(Köten) 휘하의 쿠만(Cumans) 연합군 사이에 벌어졌다. 이들은 므스티슬라프 볼드와 므스티슬라프 3세의 공동 지휘하에있었다. 이 전투는 1223년 5월 31일 현재의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의 칼카 강 유역에서 벌어졌는데, 몽골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몽골의 중앙아시아 침공과 그에 따른 호라즘 제국의 붕괴 이후, 제베 장군과 수부타이 장군이 지휘하는 몽골군이 이라크 아잠으로 진격했다. 제베는 코카서스를 거쳐 본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몇 년간 정복을 계속해 달라고 몽골 황제 징기스칸에게 허가를 요청했다. 징기스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는 습격에 나섰다. 징기스칸은 두 사람에게 원정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코카서스를 통과한 후 그들은 쿠만인을 물리치기 전에 백인 부족 연합을 격파했다. 쿠만 칸은 그의 사위인 갈리시아의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Mstislav Mstislavich)의 궁정으로 도망쳤고, 그는 몽골과의 싸움을 돕겠다고 확신했다. 므스티슬라프 볼드는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 3세를 포함한 루스 왕자들의 동맹을 형성했다.


러시아의 연합군은 처음에 몽골의 후위대를 격파했다. 루스는 며칠 동안 퇴각하는 척하는 몽골 인을 추격하여 군대를 퍼뜨렸다. 몽골군은 칼카 강 유역에서 멈춰 전투 대형을 취했다. 므스티슬라프 볼드와 그의 쿠만 동맹국은 루스의 나머지 군대를 기다리지 않고 몽골을 공격하여 패배했다. 뒤따른 혼란 속에서 몇몇 다른 루스의 왕자들은 패배했고,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는 요새화된 진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3일 동안 버텼던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한 행동을 약속하는 대가로 항복했다. 그러나 그들이 항복하자 몽골인들은 그들을 학살하고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를 처형했다. 므스티슬라프 볼드는 탈출했고 몽골인들은 아시아로 돌아가 징기스칸과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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